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6군단 쿠데타 모의 사건 (문단 편집) == 실존 여부 == 사실 별 거 없었고 그냥 군단장과 정치장교 사이의 '''알력 문제였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우선 쿠데타 시도라기에는 동기와 실제 계획이 어땠는지 너무 불분명하고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추정되는 설로는 6군단이 반란을 일으킨 후 함경북도를 기반으로 평양에 대한 [[내전]]을 일으키거나 [[대한민국 국군]]이나 [[미군]]을 청진항에 끌어들인 다음 [[특수부대]]가 평양에 잠입하여 정권을 탈취하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는데 모두 비현실적이다. 6군단의 전력은 인민군 내에서도 열악한 수준인 데다 함경북도의 생산력을 감안하면 전쟁을 벌여도 당연히 평양의 중앙 정권과는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며 쿠데타에서 중요한 것은 언론의 장악과 선전을 통한 지지의 확보인데 북한의 모든 매스미디어는 평양이 장악하고 있으며 설령 국지적인 지지를 확보한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호응이나 혼란을 야기할 역량이 되지 못한다. 한국군이나 미군이 육로로 연결된 강원도(북한)나 황해도도 아니고 해로와 항공로를 동원해야 하는 함경북도에 진입한다는 것은 더더욱 비현실적이다. 게다가 수 년간 나온 탈북자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대규모 반란 사건에 대한 처분치고는 북한 기준으로 허술한 측면이 있다. 당시 전역자들이 탄광으로 끌려갔다는 것은 원래 인민군 전역자를 아무 데나 복불복으로 끌고 가는 인민군 기준에서 비일비재한 일이다.[* 북한 용어로 무리배치라고한다. 현재까지도 최고지도자의 핵심사업으로 지정되면 제대군인에 대한 무리배치가 이뤄지고 있다.] 게다가 당시 6군단에 있었고 숙청되어 싹 쓸려야 했던 좌관급 장교들마저도 생존했다는 증언이 있으며 처형당한 경우도 가족들은 함경북도 국경지대로 추방당하는 선에서 끝났고 '''반란을 모의했다는 정치장교 중장의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반란사건이든 단순 알력사건이든 1개 군단이 해체된 사건에서 주모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는 건 이상하다. 더구나 탈북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사람이 김일성의 신임이 두터웠다는데 그런 사람이 이름조차 없다는 게 아무리 북한이지만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자세한 정황은 북한이 붕괴된 후에야 밝혀질 것이지만 현재 확실한 것은 '''"1995년에 모종의 이유로 군단장 살해 사건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김영춘(1936)|김영춘]] 주도 하에 6군단이 전격적으로 해체되었다"'''는 것 뿐이다. [[김길선]] 기자와 전소현은 6군단 사건은 군사반란이 아니라 단순히 국경지역에서 자본주의를 맛보고 돈을 국가에 바치지 않고 중간에 가로채가는 부대를 해체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하였다. [[주성하]] 기자는 6군단 반란 모의 사건이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군대도 안 갔다 와서 군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약했던 김정일이 군부를 장악하고자 한 조작된 사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https://youtu.be/r-3c-jD_tPw|링크]] 하지만 김정일이 군부에 영향력이 약했단 주장은 걸러서 들어야 한다. 김정일은 70년대에 조직지도부를 장악하고 군부의 수장 오진우를 구워삶으면서 군부 요직에 자신의 사람들을 다 심어 놓고 있었고 90년대 초반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국방위원장 자리를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 물려받으면서 군 통수권은 김일성이 죽기 전부터 행사하고 있었다. [[김평일]]이야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일개 장교에 불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